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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제노사이드 사건] 페레힐(파슬리 학살)/ 게르니카 학살/ 카틴 숲 학살
작성일 2016-04-06 오후 2:23:39 조회수 5452
작성자 평화도서관 이메일 bbanh@hanmail.net

1937년/ 페레힐(파슬리 학살)

캡션: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Rafael Leonidas Truji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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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공화국은 카리브해 에스파뇰라 섬의 서쪽에, 도미니카 공화국은 섬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두 국가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불법 이주, 난민 이동 등이 문제되어 왔고 1822년, 아이티 공화국이 도미니카를 침공해 점령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특성으로 두 국가는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해왔는데 1937년, 그러한 갈등이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도미니카 공화국은 아이티계 주민들을 추방하고 유럽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세금 기반을 확대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반면 국경지역에서는 점차 아이티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 도미니카의 라파엘 트루히요 대통령은 군에게 국경지역의 아이티인에 대한 살상명령을 내리는데 이로 인해 약 2~3만 명이 사망한다. 당시 도미니카 군은 스페인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아이티인에게 파슬리를 뜻하는 스페인어 페레힐(perejil)을 발음해보게 하여 아이티인을 구분하여 학살하였다. 이로 인해 ‘페레힐 학살’로 불린다.

 

1937년/ 게르니카 학살

캡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


1936년 2월 19일, 스페인에 인민전선 정부가 성립된다. 이에 반발한 파시즘 진영이 1936년 7월 17일에 프랑코 장군의 군부를 주축으로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다. 이에 소련과 멕시코는 공화국 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을 지원하였다. 내전이 진행 중이던 1937년 4월 26일, 독일군의 콘도르 사단은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에 있는 게르니카에 폭격을 가한다. 당시 바스크 지방은 바스크 민족주의로 인해 단독 정부가 세워져있어 단독 군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또한 바스크 인들은 반란군이 아닌 정부군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프랑코 장군은 독일군에게 게르니카에 폭격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독일군 또한 독일 비행단의 훈련 및 전투기 성능시험에 안성맞춤이므로 이 요청을 받아들인다. 이 폭격으로 마을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약 1600명이 사망하고 900명 가량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0년/ 카틴 숲 학살

캡션:  바르샤바의 카틴 학살 사건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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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 양쪽의 침공을 당한 폴란드는 두 국가에 분할 점령되고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포로가 발생한다. 이에 소련군은 정부기관이자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폴란드 포로관리를 맡긴다. 이후 NKVD는 폴란드 포로 중 반소적이거나 소련에 비협조적인 자들을 추려서 사형하는 것을 스탈린에게 건의하였고 스탈린의 승인으로 1940년,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로 인해 폴란드군의 장교와 경찰, 대학교수, 성직자, 의사 등 약 2만 명이 사망하였다. 이후 소련과 교전 중이던 독일군이 1943년에 ‘카틴 숲’에서 4천구가 넘는 사체가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까지 러시아는 이 사건에 대해 구 소련의 비밀경찰이 개입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국가적으로 책임져야할 일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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