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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은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은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은 크게 국외 전시와 국내 전시로 구성됩니다.
국외 전시 공간에는 근대 100년 동안 일어난 세계의 제노사이드 사건 가운데에서도 희생자 수가 30만 명이 넘고 특정 종족이나 구성원을 말살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던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사건 5개를 전시하였습니다.
5개 사건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 캄보디아 킬링필드, 난징대학살, 르완다 제노사이드로, 현지에서 가져온 도서와 사건의 개요, 사진, 영상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외에 세계의 학살 지역 중 우선 콩고, 수단, 대만 등에서 일어난 사건을 간단한 개요와 사진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국내 전시 공간에는 제주 4·3과 한국전쟁기의 학살, 5·18민주화운동의 개요와 사진, 영상, 관련 자료 등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의 전시물은 난징, 오키나와, 르완다, 폴란드, 아르메니아, 캄보디아, 베트남 등의 해외 학살 현장과 제주 4·3, 산청, 함양, 광주 등의 국내 현장을 두루 다니면서 현지에서 생성한 도서 자료, 동영상 자료, 사진이나 그림 자료 등 원천 자료를 수집하고, 현지 관계자와의 네트워크를 맺은 결과물입니다.


1.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Armenian Genocide

1880년대 오스만제국에는 250만여 명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 살고 있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제6차러시아-투르크전쟁이 발발하자, 자치를 희망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를 지지하고 혼란한 틈을 타 1894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오스만제국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과 이슬람주의자들 간 충돌을 유도해 제국 내에서 아르메니아인을 고립시켰으며 군대를 보내 아르메니아인을 무차별 살해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는 대개 제1차세계대전 중이던 1915~1916년에 벌어진 사건을 가리킨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제국이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3국동맹에 가담한다. 반면에, 아르메니아 혁명 세력은 러시아군을 돕는 의용군을 편성하고 오스만제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게릴라 활동을 펼친다. 아르메니아인 게릴라들이 무슬림 마을을 습격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 아르메니아인의 반란 가능성이 높아지고 오스만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배척하는 감정이 거세지면서 1915년에는 오스만제국 정부가 약 17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이라크,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이 강제 이주 과정에서 부녀자와 노약자, 어린이를 포함해 약 6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사막 한가운데서 굶어 죽거나 오스만투르크군에게 살해당했다. 또한 18세에서 50세 남자들이 징집되어 강제 노동에 투입되었다가 과중한 노동과 질병 등으로 사망했으며 최후에는 집단 사살되었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로 희생된 사람을 터키 측은 20만 명으로 집계하고 아르메니아 정부는 200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적어도 100만~150만 명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스만제국이 제1차세계대전에 패한 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에 독립국이 되었다. 터키 정부는 전신인 오스만제국이 아르메니아인을 집단 학살했다는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면서도 전쟁 중에 불가피하게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은 UN인권위원회에서 인정한 현대사의 첫 제노사이드로 기록되었다.

2. 난징대학살 Nanjing Massacre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에서 우위에 선 일본군은 패주하는 중국군을 추격해 12월 13일,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다. 그리고 바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포로로 잡힌 중국군과 무장하지 않은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다. 거리 곳곳에서 학살이 일어나 노인과 어린이, 학생과 농민 등 모두가 학살 대상이 되었다. 총칼로 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매장․사지 절단․불태워 죽이기․동사시키기․맹견의 먹이로 주기에 살인 시합까지 벌이는 등 잔혹성이 심각했다. 또한 수많은 중국 여성들이 강간당했는데 70세 이상의 노인과 미성년자, 임산부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었다. 난징에서 벌어진 강간은 1971년 벵갈 지역에서 파키스탄 병사들이 저지른 조직적 강간의 뒤를 이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역사상 최악의 사례로 꼽힐 것이다. 난징에서 강간당한 여성의 수가 2만~8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당시 여성들이 대부분 수치심․자괴감․죄의식에 통계 수집에 응하지 않아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다. 일본은 난징대학살을 자행하면서 도시를 봉쇄해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했고,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중국인들을 협박하며 허위 진술을 강요해 진실을 왜곡 보도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1946년에 조사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안타깝게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탓에 난징대학살에 대한 조사와 재판 업무가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중국 정부는 오늘날에야 <중국을 침략한 일본의 난징대도살에 난을 당한 동포 기념관侵華日本南京大屠殺遭難同胞紀念館>(약칭 난징대도살기념관)을 세워 자국의 근현대사에 관해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3. 홀로코스트 Holocaust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에 패해 식민지를 빼앗기고 승전국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전후 사회적 혼란뿐 아니라 경제적 궁핍에까지 시달리던 독일 국민은, 강력한 국가주의를 내세운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나치)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히틀러Adolf Hitler는 독일 내 보수 세력과 손잡고 게르만족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독일 재건을 약속하는 동시에 유대인 배척을 역설했다.
나치는 1933년에 정권을 잡아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는 유대인을 모든 공직에서 추방하고 유대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유대인 탄압 정책을 펼쳤으며, 1935년에는 유대인들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해 유대인과 독일인을 엄격히 분리하는 반유대주의 법인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했다.
1939년에는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유대인 재산을 강제 몰수해 전쟁 자금으로 쓰고, 독일이 점령한 유럽 각지에 게토를 설치해 그곳으로 유대인을 강제 이주시켜 격리했다. 폴란드를 점령한 뒤 폴란드 내 유대인 200만 명에게 노란 다윗의 별 배지를 달도록 하는 법을 시행했으며, 1940년에는 덴마크․노르웨이․벨기에․네덜란드․프랑스를 점령하고 50만 명의 유대인에게 유대인 신분증 발급해 그것을 지참하도록 했다. 게토에 격리된 유대인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
1942년, 베를린 외곽 지역인 반제에서는 나치 수뇌부가 모여 유대인 말살을 승인하고 대량 학살을 위한 방법을 논의했다. '반제 회의'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자리에서 논의한 내용은, 유대인들을 노동자 집단으로 만들어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자연 감소하게 하고, 그중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적절히 처리'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을 게토에서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킨 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어,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대량 학살 시설'로 운영되었다. 유럽 전역에 있던 유대인 1100만여 명 가운데 600만 명 이상이 나치의 만행으로 학살되었다.
전세가 기울자 히틀러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했고, 유대인 숙청에 큰 구실을 한 나치 친위대는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전범 재판을 통해 범죄 조직으로 선고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홀로코스트'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으로서 '국제인도법'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4. 캄보디아 제노사이드 Cambodian Genocide

1975년 4월, 연초부터 대공세를 펼치던 크메르루즈가 친미 정권을 몰아내고 캄보디아 프놈펜에 입성했다. 크메르루즈는 폴 포트Pol Pot가 이끄는 공산주의 무장 단체로 1960년대 초부터 캄보디아 농촌을 근거로 삼고 무장 투쟁을 벌이며 세력을 키웠다.
크메르루즈가 권력을 잡고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라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자 그 전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크메르루즈는 도시에 있는 인민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을 폐지했다. 학교․대학․사원․성당 등이 문을 닫았고 이동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는 물론이고 취미 활동마저 금지되었다. 캄보디아는 변형된 사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여느 사회주의국가보다 빠르게 개조되었다.
민주캄푸치아가 세워진 지 두 달 만에 프놈펜, 바탐방, 콤퐁참 등 캄보디아의 모든 도시가 텅 비고 200만~300만 명이 농촌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이주 과정에 수천 명이 영양실조, 질병, 즉결 처형 등으로 길거리에서 죽었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집단농장에서 일하면서 정해진 옷을 입고, '앙카'라는 조직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 했다.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나 반동분자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무척 가혹해, 프놈펜 시내의 고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S-21'이라는 조사 기관이 고문과 즉결 처형까지 할 수 있었다. 약 2만 명이 S-21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고 숙청되었다. 과거 정권에 협력한 정치인, 군인은 물론이고 교사, 의사를 비롯한 지식인과 그 가족도 숙청 대상이었다.
오늘날까지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정도가 지뢰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청아익을 비롯한 전국의 학살 지역에서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크메르루즈가 집권한 3년 7개월 동안 무려 약 200만 명(비공식 통계로는 약 300만 명)이 학살되었다. 캄보디아 전역이 죽음의 땅, 즉 킬링필드Killing Fields가 된 것이다. 폴 포트는 전범 재판이 열리기 전인 1998년에 사망했으며 민주캄푸치아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Nuon Chea와 행정부 수반이었던 키우 삼판Khieu Samphan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5. 르완다 제노사이드 Rwandan Genocide

독일의 식민지였던 르완다는 제1차세계대전 뒤로 벨기에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벨기에가 신분증명서를 만들고 종족 차별 정책을 펼치며 비교적 소수인 투치족을 이용해 다수인 후투족을 통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1962년에 르완다가 독립한 뒤로도 과거의 지배 구조가 이어져 투치족이 후투족을 통치했고, 이에 후투족이 거세게 대항하면서 긴장감이 높아졌다. 결국 1973년, 국방장관 하비아리마나Juvenal Habyarimana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투치족을 압박하는 정책을 펼친다. 이에 투치족이 1990년에 르완다애국전선RPF을 조직하고 정부군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혈 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1994년 4월에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이 사건에 투치족이 개입되었다고 여긴 후투족 정치 세력이 '인터라함웨'와 '임푸자무감비' 같은 무장 단체를 지원해 투치족 민간인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르완다 제노사이드로 불리는 이 사건은, 무장 단체의 무기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다는 점과 투치족을 가려내기 위한 검문 체계를 조직적으로 갖췄다는 점 등에서 체계적인 학살이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994년 4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 동안 2만 명이 넘는 투치족이 학살당했고, 7월까지는 80만 명이 넘는 투치족이 학살된 것으로 확인된다.
한편 투치족은 학살을 피해 콩고․탄자니아․우간다 등지로 떠나고 후투족은 보복이 두려워 피란을 떠나, 난민 문제가 심각해졌다. 1994년 7월에만 전염병과 기아로 4만 명 이상의 난민이 죽었다.
르완다는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를 통해 제노사이드 용의자들에 대한 재판을 이어 나가고 있으며 투치족 출신 대통령인 카가메Paul Kagame가 민족 통합 정책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고 있다.

6. 그 밖의 세계의 학살

페레힐 학살 Parsley Massacre

아이티공화국과 도미니카공화국은 각각 카리브해 에스파뇰라 섬의 서쪽과 동쪽에 있다. 이렇게 이웃한 두 국가 사이에 오래전부터 불법 이주․난민 이동 등의 문제가 있었고, 1822년에는 아이티공화국이 도미니카공화국을 침공해 점령하기도 했다.
지리적, 역사적 특성상 늘 긴장 상태에 있던 두 나라의 갈등이 1937년에 폭발하고 말았다. 당시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뒤 독재정치를 하던 도미니카공화국의 트루히요Rafael Leónidas Trujillo 대통령이 아이티계 주민들을 추방하고 유럽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세금 기반을 확대하는 정책을 폈는데, 국경 지역에서 점차 아이티인의 수와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 이에 트루히요가 국경 지역의 아이티인에 대한 살상 명령을 군에 내려, 6일 동안 약 2만~3만 명이 죽임을 당한다. 당시 도미니카 군은 아이티인을 찾는다며 흑인들에게 파슬리를 뜻하는 스페인어 '페레힐perejil'을 발음하게 했다. 아이티인은 프랑스어를 썼기 때문에 이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고 보고, 그런 사람들은 무조건 죽인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페레힐 학살'이라고 한다.책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고 있다.

게르니카 학살 Bombing of Guernica

1936년 2월 19일, 스페인에 인민전선 정부가 성립된다. 그러자 파시즘과 전쟁에 반대하는 여러 정치집단이 손잡은 인민전선에 반발한 파시즘 진영이 1936년 7월 17일에 프랑코Francisco Franco 장군의 군부를 주축으로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다. 이에 소련과 멕시코는 공화국 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을 지원했다.
그런데 내전 중이던 1937년 4월 26일, 독일군 콘도르 사단이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폭격한다. 당시 바스크 지방은 바스크 민족주의로 단독정부가 세워져 있어서 군의 통제권을 가졌으며 정부군을 지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코가 독일군에게 게르니카 폭격을 요청한 것이다. 독일군 측에서는 비행단의 훈련과 전투기 성능 시험에 안성맞춤으로 여겨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 폭격으로 마을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약 1600명이 사망하고 900명가량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틴 숲 학살 Katyn Forest Massacre

1939년, 제2차세계대전 중에 독일과 소련 양쪽의 침공을 당한 폴란드가 두 나라에 분할 점령되고 폴란드 국민 중 수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때 소련군은 정부의 비밀경찰 조직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폴란드 포로의 관리를 맡긴다. 그런데 내무인민위원회가 폴란드 포로 중 소련에 비협조적이거나 반대하는 이들을 추려서 죽이자고 건의하고 스탈린Joseph Stalin이 이를 승인해 학살이 자행되었다. 폴란드군 장교와 경찰, 대학 교수, 성직자, 의사 등 약 2만 명이 러시아 스몰렌스크 근교 카틴 숲에서 학살되었다. 이 사건이 엉뚱하게도 독일군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는데, 1943년에 소련과 교전 중이던 독일군이 카틴 숲에서 4000구가 넘는 사체가 매장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는 이 사건에 소련의 비밀경찰이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바비야르 학살 Babi Yar Massacre

제2차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9월,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이 45일간 이어진 전투 끝에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입성하지만 시내에서 일어난 폭탄 공격으로 많은 독일군 병사가 사망한다. 이 폭탄 공격은 소련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NKVD(KGB의 전신)가 벌였지만, 나치 친위대는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고 판단하고 키예프의 유대인들에게 보복하기로 한다. 이에 따라 독일군의 학살 전담 부대인 아인자츠구루펜이 키예프에 사는 모든 유대인을 집결시킨다. 당시 유대인들은 서류, 돈, 귀중품을 챙겨 집합하라는 독일군의 말에 강제 이주될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아인자츠구루펜은 유대인 10명씩 조를 짜고, 키예프 외곽의 바비야르라는 골짜기로 이동시켰다. 그러고는 유대인이 도착하는 대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 36시간이 걸린 이 학살로 약 3만 4000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아인자츠구루펜은 제2차세계대전 동안 150만 명 넘게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비야르 학살은 아인자츠구루펜이 저지른 학살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기록된다.

오키나와 강제집단사 强制集團死

태평양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3월, 미군이 오키나와 게라마 제도에 상륙했다. 본래 류큐왕국이던 오키나와는 일본의 오키나와 현이 된 1879년 이후 철저하게 황민화 교육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일본 사회에는 공공연하게 본토인과 오키나와인을 차별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미군과 맞설 지상전을 앞두고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 포로가 되어 일본 측 군사기밀을 누설할까 봐 두려웠던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미군 포로가 되면 여자는 강간당한 뒤 죽고, 남자는 사지가 잘려 죽을 것'이라며 미군에 대한 공포를 세뇌시켰다. 그러고는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주며 자살을 유도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전쟁에 대비하며 일본군을 도와 진지를 구축하고, 징병으로 자원하고, 일본군에 잠자리며 먹을거리 등을 내주었다. 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일본군은 지켜 주어야 할 주민들을 사지로 내몰고 자결을 강요한 것이다.
일본군에게 받은 수류탄뿐만 아니라 낫이나 괭이 같은 농기구가 자살에 이용되었고, 맨손으로 가족의 '죽음을 돕는' 일까지 있었다. 게라마제도에서 600여 명이 희생되었고 오키나와 전역에서 적어도 1000여 명이 오키나와 전투 중에 집단자결로 희생되었다.

2·28사건 228 Incident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은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중국에 반환된다. 이때 국민당원을 필두로 한 중국 본토인들이 타이완에 들어갔는데, 외성인外省人으로 불린 이 사람들이 관직을 독점하고 타이완에 원래 살고 있던 본성인本省人을 차별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당시 타이완 인구의 13%밖에 안 된 외성인은 일제 식민지 시절의 주요 관직을 그대로 이어받고 거주 지역을 구분하는 등 식민지 시절보다 더 심한 차별 정책을 펼쳤다.
1947년 2월 27일, 타이페이에서 전매국 직원들이 밀수 담배를 단속하던 중에 한 여성을 구타한 데다 이를 항의하던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까지 하면서 학생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로 다음 날인 28일에는 타이페이 전역에서 파업과 시위가 일어나 곧 섬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통한 강력 진압에 나섰다. 그리고 이 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약탈과 살육으로 약 3만 명이 죽었다.
국민당 정부는 40여 년 동안 계엄령을 유지하며 군사독재를 이어 오다 1987년에 계엄령을 해제했다. 결국 1988년에야 2·28사건의 진상 조사를 할 수 있었다. 1997년, 사건이 터지고 50년이 지났을 때 정부가 과거의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2·28기념탑과 기념관을 세웠다.

샤프빌 학살 Sarpeville Massacre

1948년부터 1997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이 기반인 국민당이 실권을 장악하고 펼친 강력한 인종차별 정책을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한다. 국민당 정부는 소수인 백인이 다수인 비백인非白人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관리·통제하기 편하도록 모든 비백인의 거주와 통행을 제한하는 법률(Pass-Laws)을 제정한다. 이 법률로 비백인들은 누구나 항상 신분증명서를 소지해야만 했으며 직업 제한, 토지 소유 금지, 거주지 제한, 승차 제한 등과 같은 심각한 인종 차별을 겪었다.
이에 흑인을 중심으로 한 비백인들이 범아프리카회의PAC를 결성하고 통행법에 대항하는 의미로 비폭력 시위를 계획한다. PAC가 정부에 집회 허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이들은 계획대로 신분증명서를 집에 두고 거주지 밖으로 나오는 통행권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1960년 3월 21일에 평화롭게 집회를 마친 뒤 샤프빌 경찰서 앞까지 가두 행진을 벌인다. 집회에 참여한 수천 명의 군중은 무장하지 않았으며 그중에는 여성과 아이도 있었다.
이때 경찰서 안에 있던 무장 경찰 75명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시위대 69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다쳤다. 샤프빌 사건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손미(미라이) 학살 My Lai Massacre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이 해방되었다. 식민지 시절에 독립운동을 주도한 호치민Ho Chi Minh이 이끄는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은 제네바협정(1954)에 따라 선거를 통한 단일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미국이,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인접국도 공산화된다는 도미노이론을 근거로 베트남 독립에 개입하면서 베트남전쟁이 발발한다.
초반에는 막강한 전력을 가진 미국이 우세했으나 1968년 1월, 북베트남이 '구정 공세'로 알려진 대대적 공격을 통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과 시설을 차지했다. 이에 미군도 미라이 마을을 포함해 다수의 피점령 지구를 되찾기 위해 대규모 반격 작전을 펼친다.
미 육군 23보병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찰리 중대(이하 찰리 중대)는 이 반격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모든 집에 불을 지르고 모든 식량을 없애며 우물을 폐쇄하라." 이런 명령을 받은 찰리 중대는 1968년 3월 16일, 미라이 마을에 진입하지만 적군을 전혀 찾지 못한다. 그런데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임산부와 어린이, 56개월 미만 유아가 포함된 비무장 민간인들을 사살해 마을 주민 504명이 죽었다. 이 사건은 미 군부의 은폐 탓에 알려지지 않다가 1년 뒤에야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뒤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사살 명령을 내린 소대장을 제외한 전원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게다가 소대장마저 종신형을 받았다가 가택 연금 3년으로 감형되었다.

하미 학살 Ha My Massacre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 9월,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제1이동외과병원의 장병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10명으로 구성된 비전투원 140명을 베트남에 파견한다. 1965년 2월에는 전재 복구를 위한 공병 부대와 경비 병력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 10월 이후에는 해병대 청룡부대를 비롯한 전투부대가 파견된다.
1968년 1월 30일, 음력설인 구정을 기념해 북베트남이 대규모 공세(구정 공세)를 퍼부었으며 2월에는 그에 대한 반격이 한창이었다. 이때 청룡부대는 베트남 남중부 지방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2월 25일에 하미마을에 진입한 청룡부대가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 만에 주민 135명이 죽었으며 그중 대부분이 노인, 여성, 아이 들이었다. 어렵게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희생자들의 사체를 구덩이에 묻어 무덤을 만들었지만, 한국군은 불도저를 가져다 무덤과 시신까지 훼손했다.
2000년 12월,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하미마을에 3만 달러를 기부하며 위령비를 세운다. 하미마을 사람들은 끔찍했던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학살의 경과를 비문에 새겼는데,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그것을 지워 달라고 요청한다. 마을 사람들의 반대로 비문이 지워지지는 않았으나, 연꽃이 그려진 대리석이 덧씌워진 상태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Srebrenica Massacre

유럽 발칸반도에 자리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은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등 세 민족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1년 10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듬해 4월에는 EU가 독립을 인정한다. 그러나 보스니아계가 주도한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계가 자치 공화국을 건립하고 보스니아계에 맞서는 전쟁에 돌입한다. 이 내전으로 많은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에게 살해되거나 강제 이주당했다. 특히 민병대의 폭력이 심각해, '인종 청소'라는 명목으로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무차별적 살상을 저질렀다.
내전이 막바지에 이른 1995년 7월, 세르비아가 유엔이 '안전 지역'으로 선포한 피난민 거주지인 스레브레니차를 침공한다. 당시 스레브레니차에는 약 4만 명이 세르비아인의 약탈과 살상을 피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계 보스니아인이었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한 뒤 보스니아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대개 15~50세의 남성이었지만, 여성과 유아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8000명이 넘게 죽었다. 결국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처음으로 전범에게 집단학살죄가 적용되었다.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Congo War

중앙아프리카에는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공화국이 별개의 나라로 이웃하고 있다. 이 중 콩고민주공화국은 부족 연맹체 왕국, 벨기에의 식민지 시기를 거쳐 1960년에 독립했다. 그런데 1965년에 육군 총사령관이던 모부투Joseph Mobutu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에 성공하고 냉전 시기에 서방 국가의 지원을 받아 32년간 독재 권력을 유지한다. 하지만 지역 세력 간 정권 쟁탈 경쟁, 인근 국가와의 갈등, 빈번한 게릴라 활동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다가 1996년에 제1차콩고내전이 발발한다. 그리고 이 내전에서 승리한 카빌라Laurent Desire Kabila를 필두로 한 세력이 1997년에 정권이 잡는다. 모부투와 마찬가지로 독재정치를 한 카빌라가 자신의 집권을 도운 르완다 투치족을 비롯한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함에 따라 아프리카 10여 개국이 참전한 제2차콩고내전이 발발한다. 1998년부터 5년간 이어진 이 내전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지역 분쟁으로, 이 내전 중 집단 강간․고문․학살로 약 400만 명이 사망하고 25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전이 멈춘 뒤에도 반군은 계속 활동했고 2012년 4월에는 그 활동의 여파로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지역에서 살인과 강간이 재발했다. 2013년 12월에 반군과 정부 간 평화 협상이 체결되었지만, 여전히 유혈 사태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코소보 사태 Kosovo War

인구 중 대다수가 이슬람계 알바니아인인 코소보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르비아의 자치주가 되었다. 세르비아인에게 코소보 지역은 오스만제국에 맞서 싸운 성지이자 세르비아 정교회의 교구가 처음 생긴 장소로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에 1989년, 세르비아 정부가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알바니아인에 대해 노골적인 차별 정책을 실시한다.
1991년, 세르비아의 차별 정책에 저항하던 코소보 분리주의자들이 코소보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그 이후 등장한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에 세르비아와의 교전을 증대하고, 1998년 3월에는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가 '인종 청소'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인들을 살상하며 코소보 사태가 발발했다. 특히 스켄데라이 마을에서는 전체 주민 6만 5000여 명 중 1100명이 살해당해 피해가 가장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인종 청소'로 살해된 알바니아인의 수는 약 1만 명으로 추정된다.

다르푸르 학살 Darfur Genocide

수단 서부 지명인 다르푸르는 '푸르족의 집'이라는 뜻으로 기독교계 푸르족이 농경 생활을 이어 왔는데, 유목 생활을 하던 이슬람계 아랍인들이 오랜 가뭄으로 유입되면서 종교·민족 간 갈등이 생겼다. 그런데 수단 정부가 친이슬람 정책인 '아랍화 정책'을 택하자 푸르족이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저항하다 2003년 2월에는 '수단해방군SLMA'을 비롯한 무장투쟁 단체를 만들어 북다르푸르 지역 군의 초소를 공격하며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수단 정부는 정부군 병력으로는 반군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비밀리에 지원하던 아랍계 민병대인 '잔자위드'를 투입해 반군을 진압한다. 잔자위드는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반군뿐 아니라 해당 지역의 무장하지 않은 기독교계 흑인까지 무참히 살해한다. 게다가 반군을 지원하는 마을들에서 방화, 살인, 약탈, 강간 등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2003년 2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진행된 이 분쟁에서 약 30만 명이 사망하고 2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유엔평화유지군의 배치, 정전협정 등의 노력이 이어졌으나 다르푸르에서는 지금까지도 유혈 사태가 간헐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수단 정부는 잔자위드와의 연계성을 계속 부인하고 있다.

7. 한국의 학살

제주 4・3사건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독선거)・단정(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 2003, 536쪽.)이다.
1947년 3월 1일, 3·1절 제28주년 기념 대회에 모인 사람들을 해산하는 과정에 경찰의 발포로 14명의 사상자(6명 사망, 8명 부상)가 발생했다. 이에 제주도민은 3·10민관총파업을 일으켜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미군정은 오히려 제주도민을 탄압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1년 동안 이어진 대규모 검거와 탄압이 무장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경찰지서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4월 28일에 국방경비대의 김익렬 제9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평화 협상을 했지만, 협상 사흘 만인 5월 1일에 우익 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 사건'이 벌어지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이 깨졌다. 그리고 미군정이 5・10선거를 독려했지만, 결국 제주도의 세 선거구 중 두 선거구가 투표율 미달로 무효가 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강경 진압 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했다.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생활의 터전을 잃은 주민 2만 명가량이 산으로 도피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다.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 5100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는 4・3사건의 인명 피해 규모를 2만 5000~3만 명으로 추정(537쪽)했다. 4・3위원회에 신고된 가해자는 토벌대가 78.1%(1만 955명), 무장대가 12.6%(1764명)로 나타났다. 희생자는 10세 이하 어린이(5.8%, 814명)와 61세 이상 노인(6.1%, 860명)이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여성의 희생(21.3%, 2985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 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2003년 10월 3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그리고 2014년 3월 24일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4・3사건은 아직도 역사적으로 올바른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하다. 제주시 봉개동에 건립된 <제주4・3평화기념관>의 상설전시실 제1관에는 '4・3백비白碑'가 있는데, 백비는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이다. '제주 4・3'을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는 것이 아직도 올바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도 백비는 이름을 새기지 못한 채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누워 있다.
-유철인 제주4・3연구소장, 제주대 교수

한국전쟁기 학살

한국전쟁은 동족 간의 내전이었고, 이 내전 중에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시점부터 남한에서는 극심한 좌우 대립이 지속되었고, 반란군 토벌을 명분으로 군경의 양민 학살, 좌익과 우익 간 상호 보복이 일어났다. 1948년 제주 4·3봉기 이후 군경의 토벌 작전으로 제주의 민간인 약 3만 명이 살해되었고, 여수의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 인근 지역 좌익이 이에 합세하자, 군경은 반란군에 협조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래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면전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민간인 10만 명 정도가 토벌 작전 과정에 좌익 혐의로 살해되었다. 한국전쟁은 1948년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폭력과 학살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체제 존립의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이 많은 민간인을 불법 처형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국민보도연맹 관련자와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학살이다. 좌익 인사를 계몽․지도한다며 1949년에 조직된 관변 단체인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는 전쟁 직전까지 전국적으로 약 3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적어도 70% 정도는 사상과 이념은 물론이고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양민良民'이었다. 북한이 남침하자 이승만 정권은 각 경찰서에서 파악하고 있던 보도연맹원과 반정부 혐의자들을 '예비검속'하거나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 즉 학살을 자행했다. 서울이나 강화 등 경기 서북 지방의 경우 워낙 갑작스럽게 인민군이 내려와서 미처 보도연맹원을 구금․처형하지 못했지만, 경기도 시흥․안양 이남의 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인민군이 점령하기 직전에 학살이 벌어졌다. 예비검속의 주체는 주로 경찰이었지만, 명령과 집행은 주로 육군 헌병대와 방첩대(CIC)․해군정보부(G-2) 및 민간 조직까지 관여했다. 보도연맹원, 좌익 사건 관련 수감자,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학살은 거의 전국에서 발생했는데,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은 대전이며 대구․부산․전주․광주․마산 등지의 형무소 수감자들도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학살되었다. 대전 이남의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모든 지역에서 대체로 1950년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까지 학살이 벌어졌는데 경남 지역의 피해 규모가 가장 크다. 전국적인 피해 규모는 아직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전쟁 발발 초기에 갑자기 투입된 미 지상군과 공군은 적으로 의심되는 많은 피난민들을 살해했다. '노근리 사건'을 비롯해 상당수의 경우는 미군이 민간인 신분을 확인하고도 그들에게 포격, 폭파, 기총소사, 집중 사격을 감행했다. 단양 곡계굴, 예천 산성리, 마산 곡안리와 함안, 사천, 의령, 포항 등지에서도 미군 측의 공중 폭격, 기총소사나 함포사격으로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북한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에 따른 희생 문제는 전쟁 당시부터 많이 제기되었다. 북한 측은 1951년 7월 11일부터 8월 20일까지 1만 대를 넘는 미국 비행기가 250회 이상 출격해 무고한 민간인 4000명을 죽였으며,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폭격으로 민간인이 100만 명 이상 죽고 황해도 신천에서 3만 5380명이 죽임을 당하는 등 미군 점령지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앞으로 남북한의 공동 조사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사실 인민군도 남한을 점령했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서천, 대전, 양평, 서울, 원주 등지에서 많은 우익 인사와 그 가족을 학살했다. 이 밖에 지방 좌익이 저지른 학살도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또한 국군 11사단은 후방에 잔류한 인민군과 그들과 합세한 좌익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은 거창, 산청, 함양 등지에서 1951년 2월에 11사단 9연대가 저지른 학살이다. 이 사건 직전인 1950년 겨울부터 1951년 봄 사이에 함평, 남원․순창․임실, 나주․장성 등지에서도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 고창과 영광에서는 지방의 좌익과 우익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보복 학살이 1951년 중반까지 이어졌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인민군이 북으로 패퇴한 뒤 남은 부역자들에 대한 집단 학살도 광범하게 벌어졌다. 한국군과 미군이 북으로 올라간 뒤 치안 공백 상태에서 지방의 우익 단체가 부역자들을 색출하고 집단적으로 처형하는 일도 발생했다. 강화, 고양, 파주, 양평, 여주 등지에서 현지 경찰의 묵인이나 비호 아래 우익 단체가 좌익 부역자를 처형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사적인 보복 양상을 띤 이런 사건의 실상이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웃 간 보복 살육이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전남 지역이다. 전라도 지역은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점령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물러간 뒤 주민들 사이에서 보복적인 학살이 많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주민들 사이에 벌어진 보복적 학살은 좌우익의 이념 대립뿐만 아니라 지주와 소작인, 양반과 상민 간 신분 차별, 씨족 간 대립과 갈등까지 중첩되어 진행되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5․18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각 지역에 계엄군을 배치한다. 이 조치는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10·26사건 이후 한 걸음 한 걸음 진행되던 대다수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1980년 봄, 민주화 열기가 드높던 광주에서는 대학생들을 선두로 비상계엄 확대를 반대하는 시위가 전개되었다. 항쟁의 도화선은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처음 불붙었다.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쫓긴 학생들이 금남로를 비롯한 시내로 이동해 시위를 전개했는데,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까지 곤봉으로 무조건 때리고 강제로 끌고 가는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들이 하나로 뭉쳐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시민의 분노는 점점 커져 광주 시내 고교생들이 시위에 동참했으며, 택시 기사들이 주축이 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계엄군이 진주한 전남도청을 향해 밀려들었다. 계속 왜곡 보도만 일삼던 광주MBC 사옥은 불길에 휩싸였다.
5월 21일,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 당국의 사과를 요구하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해 금남로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했고, 계엄군에 맞섰다. 항쟁 기간 동안 광주는 외부와 단절된 고립무원의 도시였다. 시민들은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전남 지역 곳곳으로 항쟁을 확산해 나가는 한편, 사회 각 분야의 인사들로 <5·18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계엄 당국과 협상하는 등 사태 수습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항쟁 지도부가 있던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열흘 동안 이어진 5·18민주화운동이 그 막을 내렸다. 민주주의가 압살되는 순간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은 불법적으로 집권을 획책하는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고 민주화를 요구한 시민 봉기다. 항쟁 기간 동안 치안이 부재한 상황이었는데도 금융기관이나 금은방에서 절도 사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을 만큼 수준 높은 시민 정신이 발휘되었다.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헌혈 행렬을 만들며 어려운 가운데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런 사실은 5·18민주화운동이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이성적․초도덕적 투쟁이었음을 증명한다.
뒷날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진상 규명 요구에 따라 1980년 당시 신군부 세력들은 법적 단죄를 받았으며 5·18국가기념일 제정, 5·18묘지 성역화 사업, 5·18민주유공자 예우 등 일련의 명예 회복 조치가 진행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유신 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부각하는 계기로 작용해 끝내 그 체제를 붕괴시키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으며, 50년 만에 여야 간 정권 교체를 이루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결국 5·18민주화운동은 역사적인 민중 항쟁을 통해 표출되던 민주․자주․평화의 전통을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 중 민주주의 발전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민권 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5·18기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