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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제노사이드 사건] 바비야르 학살/ 2.28사건/ 샤프빌 학살
작성일 2016-04-06 오후 2:13:10 조회수 5569
작성자 평화도서관 이메일 bbanh@hanmail.net

1941년/ 바비야르 학살 

캡션:  학살당한 유대인의 짐과 옷가지들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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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9월,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45일간 지속된 전투 끝에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입성하지만 시내에서 일어난 폭탄 공격으로 많은 독일군 병사가 사망한다. 이 폭탄 공격은 소련군은 정부기관이자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NKVD(KGB의 전신)이 벌인 것이지만 나치 친위대(SS)는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고 판단하고 키예프의 유대인들에게 보복하기로 한다. 이에 독일군의 아인자츠그루펜(이동학살부대)은 키예프 시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집결시킨다. 당시 유대인들은 서류, 돈, 귀중품을 챙겨 집합하라는 독일군의 말에 강제 이송당할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아인자츠그루펜은 유대인 10명씩 조를 짜서 키예프시 외곽에 있는 바비야르라는 골짜기로 이동시켰으며 도착하는 대로 기관총을 난사해 학살을 저질렀다. 총 36시간이 소요된 이 학살로 약 3만 4천명의 유대인이 사망하였다. 바비야르 학살은 아인자츠르구펜이 저지른 가장 큰 규모의 학살로 기록되며 아인자츠그루펜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2·28 사건

캡션: 228 기념탑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은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1945년, 중국으로 반환된다. 반환되면서 국민당을 필두로 한 중국 본토인들이 대만으로 유입되었다. 이들 외성인(外省人)이 관직을 독점하고 타이완에 본래 살고 있던 대만인(본성인(本省人))을 차별하면서 본성인(85%)과 외성인(13%)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외성인은 일제 식민지 시절의 주요 관직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본성인과 외성인의 거주지역을 구별하는 등 식민지였을 무렵보다 더한 차별 정책을 펼쳤다.
1947년 2월 27일, 타이페이 시에서 전매국 단속원들이 밀수 담배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한 여인을 과하게 구타하였고, 항의하던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여 학생 한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다음날인 28일, 타이페이 시 전역에서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고 곧 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통한 강력진압에 나섰다. 이러한 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약탈과 살육으로 약 3만 명이 사망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40여 년 동안 계엄령을 내려 군사독재를 이어오다가 1987년 비로소 계엄령이 해제되어 1988년에 2·28사건 진상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97년, 사건 50년이 지난 이후에야 대만 정부가 과거의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2·28기념탑과 기념관을 세웠다.

 

 

1960년 / 샤프빌 학살

1948년부터 1997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당인 국민당(네덜란드계 백인 기반)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펼친 강력한 인종차별정책을 가리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고 한다. 국민당 정부는 소수인 백인이 다수인 비(非)백인을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관리·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모든 비(非)백인들의 거주와 통행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한다.(통행법(Pass-Laws)??) 이 법률로 인해 비(非)백인들은 누구나 항상 신분증명서를 소지해야만 했으며 직업 제한, 토지 소유 금지, 거주지 제한, 승차 제한 등과 같은 심각한 인종 차별을 겪어야 했다.
이에 흑인을 중심으로 한 비(非)백인들이 범아프리카회의(Pan-Africanist Congress)를 결성하여 이 법에 대항하는 의미로 비폭력시위를 계획한다. PAC가 정부를 상대로 낸 집회요청이 거절당하자 이들은 계획대로 통행권 운동(신분증명서를 집에 두고 거주지 밖으로 나오는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1960년 3월 21일 평화롭게 집회를 마치고 샤프빌 경찰서 앞까지 가두행진을 벌인다. 집회에 참여한 수천 명의 군중은 무장하지 않았으며 그중에는 여성과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경찰서 안에 있던 75명의 무장한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시위대 69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는다. 샤프빌 사건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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