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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영화 상영 안내
작성일 2016-04-05 오후 10:07:06 조회수 4237

 

20164월 평화를 품은 집 영화 상영 안내

 

평화를 품은 집 소극장에서 4월의 영화를 선정 했습니다.

매년 사월이면 남쪽에서부터 피기 시작한 산수유, 개나리가 평화를 품은 집 언덕에도 예쁜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예쁘고 아름답기만 해야 할 사월이 우리에게 아픈 기억들로 가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주4.3, 세월호,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킬링필드, 르완다 제노사이드, 카틴 학살 등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사건들이 모두 사월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품은 집은 사월의 또 어느 날에 위와 같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4월의 영화 주제를 사월의 기억으로 잡았습니다. 194843일 제주, 199446일 르완다, 1975417일 캄보디아, 1915424일 아르메니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독일의 바이체커 대통령은 198558일 한 연설에서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비인간적인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시금 그러한 위험에 감염될 소지가 많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아프고 슬픈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준 것 같습니다.

 

4/3() 오후 2

 

<비념>

 

정보 : 한국, 93, 15세 이상 관람가능, 키워드-제주4.3, 학살, 강정

요약 : 4.3 사건으로 상처 입은 제주도와 제주사람들...

 

그리고 지금 아프게 부서져 가는 강정마을의 이야기

 

제주시 애월읍 납읍에 살고 계신 강상희 할머니, 할머니의 남편 김봉수는 4.3으로 희생되었다. 해군기지 문제로 떠들썩한 서귀포시 강정마을. ‘4.3의 원혼이 통곡한다와 같은 수많은 현수막이 제주 4.3과 해군기지 문제가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카메라는 유령처럼 제주도 납읍리, 가시리, 강정마을, 일본 오사카 등을 돌며 그 흔적과 균열들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다시 강상희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집 앞마당으로 돌아온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잠자리 밑에 녹슨 톱을 두고 살아온 할머니의 삶...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짊어진 제주도와 제주사람들의 삶에서 녹슨 톱은 언제쯤 치워질 수 있을까.

 

 

<<제주 4?3사건>>

제주 4?3사건은 '19473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독선거)?단정(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4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9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 2003, 536.)이다.

194731, 3·1절 제28주년 기념 대회에 모인 사람들을 해산하는 과정에 경찰의 발포로 14명의 사상자(6명 사망, 8명 부상)가 발생했다. 이에 제주도민은 3·10민관총파업을 일으켜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미군정은 오히려 제주도민을 탄압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1년 동안 이어진 대규모 검거와 탄압이 무장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84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경찰지서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428일에 국방경비대의 김익렬 제9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평화 협상을 했지만, 협상 사흘 만인 51일에 우익 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 사건'이 벌어지고, 5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이 깨졌다. 그리고 미군정이 5?10선거를 독려했지만, 결국 제주도의 세 선거구 중 두 선거구가 투표율 미달로 무효가 되었다.

194811월부터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강경 진압 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했다.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생활의 터전을 잃은 주민 2만 명가량이 산으로 도피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다.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5100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4?3사건의 인명 피해 규모를 25000~3만 명으로 추정(537)했다. 4?3위원회에 신고된 가해자는 토벌대가 78.1%(1955), 무장대가 12.6%(1764)로 나타났다. 희생자는 10세 이하 어린이(5.8%, 814)61세 이상 노인(6.1%, 860)이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여성의 희생(21.3%, 2985)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 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2003103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그리고 2014324일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4?3사건은 아직도 역사적으로 올바른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하다. 제주시 봉개동에 건립된 <제주4?3평화기념관>의 상설전시실 제1관에는 '4?3백비白碑'가 있는데, 백비는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이다. '제주 4?3'을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는 것이 아직도 올바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도 백비는 이름을 새기지 못한 채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누워 있다.

*평화를 품운 집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에서 -유철인 제주4?3연구소장, 제주대 교수

 

 

4/10() 오후 2

 

<호텔 르완다>

 

정보 : 영국,이탈리아 121, 12세 이상 관람가능, 키워드-학살, 르완다. 인간애,

요약 : 100일 동안 1,268명의 목숨을 지켜 낸 한 남자의 감동 실화!

 

1994년 르완다 수도 키갈리.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두 부족의 공존을 위해 평화 협정에 동의하면서 수십 년간 이어진 후투족과 투치족의 대립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평화 협정의 진행을 돕기 위해 UN군이 파견되었고, 수많은 외신 기자들이 이 역사적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르완다로 몰려들었다.

르완다의 최고급 호텔 밀 콜린스의 호텔 지배인인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는 평화 협정과 관련하여 밀려드는 취재 기자와 외교관들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랑 받는 가장이자 지배인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폴은 하루빨리 협정이 체결돼 르완다가 안정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대통령이 살해당했다. 큰 나무를 베라. 투치족을 쓸어버리자!˝

 

르완다의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르완다의 상황은 악화된다. 후투족 자치군은 대통령 살해의 책임을 빌미로 아이들까지 투치족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온건파 후투족까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위협을 느낀 폴은 투치족 아내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호텔로 피신한다. 이후 그곳으로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모여드는데

 

˝차마 그들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전세계도 외면한 잔혹한 학살 속에서 가족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1,268명의 이웃을 지키기 위해 홀로 힘겨운 싸움을 하는 폴. 불가능해 보이는 그의 도전이 뜨거운 감동으로 당신을 적신다

 

<<르완다 제노사이드 Rwandan Genocide>>

 

독일의 식민지였던 르완다는 제1차세계대전 뒤로 벨기에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벨기에가 신분증명서를 만들고 종족 차별 정책을 펼치며 비교적 소수인 투치족을 이용해 다수인 후투족을 통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1962년에 르완다가 독립한 뒤로도 과거의 지배 구조가 이어져 투치족이 후투족을 통치했고, 이에 후투족이 거세게 대항하면서 긴장감이 높아졌다. 결국 1973, 국방장관 하비아리마나Juvenal Habyarimana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투치족을 압박하는 정책을 펼친다. 이에 투치족이 1990년에 르완다애국전선RPF을 조직하고 정부군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혈 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19944월에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이 사건에 투치족이 개입되었다고 여긴 후투족 정치 세력이 '인터라함웨''임푸자무감비' 같은 무장 단체를 지원해 투치족 민간인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르완다 제노사이드로 불리는 이 사건은, 무장 단체의 무기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다는 점과 투치족을 가려내기 위한 검문 체계를 조직적으로 갖췄다는 점 등에서 체계적인 학살이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99449일부터 11일까지 3일 동안 2만 명이 넘는 투치족이 학살당했고, 7월까지는 80만 명이 넘는 투치족이 학살된 것으로 확인된다.

한편 투치족은 학살을 피해 콩고?탄자니아?우간다 등지로 떠나고 후투족은 보복이 두려워 피란을 떠나, 난민 문제가 심각해졌다. 19947월에만 전염병과 기아로 4만 명 이상의 난민이 죽었다.

르완다는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를 통해 제노사이드 용의자들에 대한 재판을 이어 나가고 있으며 투치족 출신 대통령인 카가메Paul Kagame가 민족 통합 정책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고 있다.

 

*평화를 품은 집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에서

 

 

 

 

 

 

4/17() 오후 2

 

<잃어버린 사진>

 

정보 : 캄보디아, 90, 15세 이상 관람가능, 키워드-캄보디아, 킬링필드

요약 :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정권 당시의 억압된 처참한 기억을 크레이 인형과 사진, 기록영화 이미지로 재구성하였다. 자료화면으로 대변되는 공적 역사와 찰흙인형으로 재현된 사적 기억이 절묘하게 겹치며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를 다시 써나간다.

 

<<캄보디아 제노사이드 Cambodian Genocide>>

 

19754, 연초부터 대공세를 펼치던 크메르루즈가 친미 정권을 몰아내고 캄보디아 프놈펜에 입성했다. 크메르루즈는 폴 포트Pol Pot가 이끄는 공산주의 무장 단체로 1960년대 초부터 캄보디아 농촌을 근거로 삼고 무장 투쟁을 벌이며 세력을 키웠다.

크메르루즈가 권력을 잡고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라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자 그 전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크메르루즈는 도시에 있는 인민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을 폐지했다. 학교?대학?사원?성당 등이 문을 닫았고 이동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는 물론이고 취미 활동마저 금지되었다. 캄보디아는 변형된 사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여느 사회주의국가보다 빠르게 개조되었다.

민주캄푸치아가 세워진 지 두 달 만에 프놈펜, 바탐방, 콤퐁참 등 캄보디아의 모든 도시가 텅 비고 200~300만 명이 농촌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이주 과정에 수천 명이 영양실조, 질병, 즉결 처형 등으로 길거리에서 죽었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집단농장에서 일하면서 정해진 옷을 입고, '앙카'라는 조직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 했다.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나 반동분자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무척 가혹해, 프놈펜 시내의 고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S-21'이라는 조사 기관이 고문과 즉결 처형까지 할 수 있었다. 2만 명이 S-21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고 숙청되었다. 과거 정권에 협력한 정치인, 군인은 물론이고 교사, 의사를 비롯한 지식인과 그 가족도 숙청 대상이었다.

오늘날까지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정도가 지뢰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청아익을 비롯한 전국의 학살 지역에서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크메르루즈가 집권한 37개월 동안 무려 약 200만 명(비공식 통계로는 약 300만 명)이 학살되었다. 캄보디아 전역이 죽음의 땅, 즉 킬링필드Killing Fields가 된 것이다. 폴 포트는 전범 재판이 열리기 전인 1998년에 사망했으며 민주캄푸치아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Nuon Chea와 행정부 수반이었던 키우 삼판Khieu Samphan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평화를 품은 집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에서

 

 

 

 

4/24() 오후 2

 

<종달새농장>

 

정보 : 이탈리아 외, 122, 15세 이상 관람가능, 키워드-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 터키

요약 : 한 집안에 들어 닥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1차 대전 중 터키. 아르메니아 출신의 아바키안 집안 맏아들 아람은 동생의 귀국을 준비하며 아버지가 남 긴종달새 농장을 수리한다. 한편 막내딸 누닉은 터키군인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터키정부가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명하자 이들은 모두 종달새 농장으로 피신한다. 터키군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라는 정치적 문제를 다룬 신작으로 역사(집단) 속에서만 개인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감독들의 영화적 주관이 살아있다. 우리에게도 학살의 역사가 있었기에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Armenian Genocide>>

 

1880년대 오스만제국에는 250만여 명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 살고 있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제6차러시아-투르크전쟁이 발발하자, 자치를 희망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를 지지하고 혼란한 틈을 타 1894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오스만제국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과 이슬람주의자들 간 충돌을 유도해 제국 내에서 아르메니아인을 고립시켰으며 군대를 보내 아르메니아인을 무차별 살해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는 대개 제1차세계대전 중이던 1915~1916년에 벌어진 사건을 가리킨다. 1914,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제국이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3국동맹에 가담한다. 반면에, 아르메니아 혁명 세력은 러시아군을 돕는 의용군을 편성하고 오스만제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게릴라 활동을 펼친다. 아르메니아인 게릴라들이 무슬림 마을을 습격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 아르메니아인의 반란 가능성이 높아지고 오스만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배척하는 감정이 거세지면서 1915년에는 오스만제국 정부가 약 17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이라크,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이 강제 이주 과정에서 부녀자와 노약자, 어린이를 포함해 약 6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사막 한가운데서 굶어 죽거나 오스만투르크군에게 살해당했다. 또한 18세에서 50세 남자들이 징집되어 강제 노동에 투입되었다가 과중한 노동과 질병 등으로 사망했으며 최후에는 집단 사살되었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로 희생된 사람을 터키 측은 20만 명으로 집계하고 아르메니아 정부는 200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적어도 100~150만 명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스만제국이 제1차세계대전에 패한 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에 독립국이 되었다. 터키 정부는 전신인 오스만제국이 아르메니아인을 집단 학살했다는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면서도 전쟁 중에 불가피하게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은 UN인권위원회에서 인정한 현대사의 첫 제노사이드로 기록되었다.

 

*평화를 품은 집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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