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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의 피난민과 피난민 수용소' 전갑생 교수님 [2017 출판도시 인문학당]
작성일 2017-11-04 오후 2:45:47 조회수 5120
작성자 안세원 이메일 angelico.asw@gmail.com

 

"1953년 3월 31일 파주 피난민수용소에 1,254명과 연천 피난민수용소에 3,367명, 금천 피난민수용소에 23,774명 전체 28,395명이 수용소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 파주 전체 인구는 127,014명이다. 같은 해 9월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야동 9,983명, 주내 1,586명, 적성 3,331명, 장단 9,314명, 교하 2,122명, 조리 55명 전체 26,380명의 피난민들이 임시수용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RG 554, Team Reports, 1951 - 1953, Entry A1 1303, Box 79, MAR: Kyunggi-do, Sep. 53 CAC team. (전갑생, '파주 문산과 피난민 : 통제, 규율, 배급 수용소', 2017에서 재인용).

 

 

전갑생 교수님의 강연은 미국 메릴랜드 주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한국전쟁(KOREA WAR)’ 사진자료실에서 직접 담아오신 사진들을 보여주시어 피난민들의 삶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진 설명: 피난민 수용소에서 심문을 기다리는 사람들(RG 111-SC 378119, 1950년 8월 26일 2통신대대 사진중대 상등병 에스티즈(Leslie. E. Estes) 촬영)(전갑생, '파주 문산과 피난민 : 통제, 규율, 배급 수용소', 2017에서 재인용).

 

'피난민'과 '피란민'은 같은 단어로 보이지만 매우 다르게 쓰였습니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피란민'으로 불리며 사상적으로 의심 받고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파주 문산 일대에 1951년부터 자리 잡은 피난민들은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이었고, 이 시기는 한국정부와 미군의 피난민 정책이 뿌리를 내리는 시점이었습니다. 즉, 파주 문산 일대 피난민들은 배고픔과 전염병, 더불어 정부 통제에서 벗어나면 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이중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1950년 7월 19일 25사단 작전 부관참모실은 “적이 여성과 아이를 동반해 아군의 후방을 침투하기 때문에 전투지역에 있는 모든 한국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으로 인해 수많은 피난민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사진 설명: 피난민이 길에 쓰러져 죽어 있는 모습(RG 111-SC 347020, 1950년 8월 25일 상등병 잉그램(Ingram)이 촬영)(전갑생, '파주 문산과 피난민 : 통제, 규율, 배급 수용소', 2017에서 재인용).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뛰어나다는 경쟁과 힘겨루기가 아니라, 그 가운데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파주는 전쟁의 시작(남침)과 끝(포로 귀환)을 고스란히 경험한 곳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잊고있었던 파주의 역사를 - 문산 임시포로수용소와 피난민, 비무장지대 등 - 를 기억하며 평화를 이야기하는 파주가 되길 바랍니다. 

 



* 강연자료(전갑생, '파주 문산과 피난민 : 통제, 규율, 배급 수용소', 2017) : 첨부파일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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